칸덴스키(Wassily Kandinski, 1866-1944)의 "공상적 즉흥"

<공상적 즉흥>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풍경이나 인물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은 화가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작품속에서 구체적 대상이 배제된 추상화가 마침내 출발하였다. 이제 백년의 역사를 추상화는 눈 앞에 두고 있지만, 내 전시회에 오는 사람들은 아직도 작품에서 꽃이나 사람같은 형태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나무나 사람같은 자연의 대상을 그리지 않고, 색채(color) 와 선 (line), 형태(shape), 질감 (texture) 만으로 작가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현대의 추상화는 러시아 태생의 칸덴스키가 1910년에 그린  '공상적 즉흥'에서 출발하였는데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여러 날동안 한 주제를 놓고 작업에 열중하던 칸덴스키가 잠시 외출했다가 해 질 무렵에 작업실에 돌아왔다. 화실에 들어선 그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저녁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한쪽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그림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색채와 이상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강렬한 인상에 칸덴스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림을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그 작품이 자신의 그림 하나가 옆으로 돌려져 잘못 놓여져 있던 것이라는 걸 알고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부터 칸덴스키는 이러한 감동을 작품속에 살려볼려고 하였으나 잘 되지가 않았다. 옆으로 눕혀도 보았으나 언제나 대상만 분명하게 보일 뿐, 색채와 형태로만 된 아름다운 광채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는 산이나 꽃과 같은 그림 속의 뚜렷한 대상이 색채와 형태를 방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그는 "왜 화가들이 순수한 색채와 형태만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빠지게 되었다. 고민하고 작업을 거듭한 끝에 칸덴스키는 교향악이 새소리나 물소리를 흉내내지 않아도 음의 길이와 높낮이를 여러 악기로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어 사람을 감동시키듯이, 미술도 꽃이나 여인의 자태를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아도 색채와 형태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색채와 형태가 사람에게 주는 느낌을 분석했고, 자연의 대상을 떠나 색채와 형태만 있는 그림, 자신의 느낌이 배어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상화는 출발하였다.

2004년 4월 미주중앙일보 "이 한장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