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멋

비행기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가까워질 무렵, 하늘에선 보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대지는 마치 노란색 카펫이 깔려 있는 듯, 봄빛 닮은 유채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몇 시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가벼운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 있는 마음으로 프랑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여행으로 지쳤기 때문이었을까, 처음 본 파리의 표정은 냉담해 보였다. 하지만 이 첫 느낌은, 곧 접할 수 있었던 파리의 모습에서 쉽게 지울 수가 있었다.


<로뎅 미술관에서>

짐을 풀고 곧장 에펠탑으로 향했다. 파리는 오래된 문화 유산과 첨단의 패션이 공존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안개와 가랑비에 젖은 조각으로 된 동네 건물과 젊은이들의 멋진 모습이 한층 어울려 보였다. 돌아오는 길엔 일부러 복잡한 골목길을 택하여 걸어보았다. 100 년 된 빵집, 3 대째 커피를 판다는 커피 전문점 등 오래된 가게들을 지나는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퇴근길에 우산처럼 길다란 식사용 빵을 손에 들고 걸어가는 사람들 또한 자주 볼 수 있었다.

지난 수 백년동안 도시 곳곳에 세워진 크고 작은 미술관들은 파리 시민들의 생활에 일부가 된 듯 보였다. 출퇴근 길에 가볍게 전시장을 둘러보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며 여유있게 작품을 감상하는 주부들, 대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카피하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견학 나온 어린이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설명하는 미술관 직원들. 이들을 보면서 프랑스인의 삶과 문화현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채 10 살도 되지 않은 학생들이 피카소의 작품이 즐비한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모네의 정원을 산책할 수 있는 곳. 집만 나서면 미술관이 코 닿을 곳에 있고, 그 곳에서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곳, 파리 !!!

어느 날 나는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있는, 예술의 다리 (Pont des Arts) 를 건너다가 한 무리의 예술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이 많은 유학생들로,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 비평을 하거나, 혹은 사진 전시회를 하기 위해 파리에 온 작가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서로의 관심사를 털어놓고 매우 유쾌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더 이상 파리에서의 생활을 연장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없기에 비싼 물가 속에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작업과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가난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목표와 현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파리에서는 어디를 가든 깔끔하고 멋진 패션감각의 멋쟁이 할머니들을 볼 수 있다. 우아하게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고 자신의 분위기를 잘 살려 주는 악세사리를 한 파리지엥 할머니들. 이들은 이렇게 우아한 차림으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동네 마켓에서 꽃과 찬거리를 구입하기도 한다. 이런 할머니들의 여유롭고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익혀온 다양한 문화체험과 생활 속 깊이 스며든 예술로부터 온 것이 아닌듯 싶다.

멋쟁이 파리지엥 할머니들이 미술관에서 여유롭고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 지금도 가끔씩 떠오른다. 이십년 후에 내 모습을 그려보며, 미소지어본다.

2004 년 6 월 미주중앙일보 "여자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