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사랑 나누기

얼마전 평소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분이 스튜디오를 방문하였다 . 미술 비평에 권위자인 그녀는 팔십을 눈앞에 둔 할머니임에도 비영리 갤러리를 두 개나 운영하면서 화가들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 여생을 헌신하다시피하고 있다. 그녀가 운영하는 갤러리에서는 일년에 한 차례씩 멋진 기금모금 파티를 열어 미술품을 경매하는 데, 이 날은 내게서 작품을 기증받으러 온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말을 꺼내기가 난처한 듯 보여서, 내가 먼저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보라고 웃으며 권하였다. 평생동안 학생과 화가, 그리고 사회를 위해 해 온 큰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또 해마다 조그만 소품을 가져갔기 때문에 작은 각오를 하고 권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내가 무척이나 아끼는 대형 TV 만한 작품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내 얼굴을 살폈다. 일순간 심장이 멎는 듯 놀랬지만 다행히 침착을 잃지 않고 흔쾌한 듯 대답할 수가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면서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을 어떻게 기증받느냐고 물어 보았다 . 그녀는 기증도 많이 받지만 자신이 평소에 사 두었던 작품들이 주로 경매에 나온다고 하였다. 다시말해, 아끼는 화가들을 돕기 위해 연금을 쪼개고 저축을 털어서 작품을 사 모으고 다시 경매에 내 놓으면, 자기가 지불한 가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서 작품은 판매되고, 수익금은 갤러리의 운영자금으로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셈법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녀의 큰 뜻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작품 아까운 생각만 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웃에 가까이 살면서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타일랜드 태생의 화가가 있다 . 이제 육십을 막 넘긴 이 화가는 타일랜드 정상의 화가로 이곳 미국의 대학 교재에도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그는 타일랜드와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데, 그의 미국 집에는 본국에서 오는 손님의 발걸음이 끊일 날이 없다. 문화계에서 내노라라고 하는 손님들이 짧게는 몇일 길게는 몇 달동안이나 머무른다. 타이 화가는 마치 여행사 직원같이 오는 손님의 취향에 따라 일정을 짜서LA 근교의 문화 시설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미전국을 돌며 볼만한 곳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미국이 초행인 젊은 화가들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전시 준비를 하기도 하는 데, 이달 중순에는 타일랜드 동서남북 지역에서 두 명씩의 미대생들을 초청해서 2 주동안 미국의 예술을 소개한단다. 조국 타일랜드와 미국에 문화적 가교를 놓으려는 그의 집념이 벌써 삼십년을 넘기고 있다.

지난 주에는 어느 부동산 회사에서 딸아이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해서 별 생각없이 시상식에 참석을 했다 . 식장안에 들어서면서 수 백명의 참석자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는 북새통에 놀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십년 째 장학사업을 해온 어느 에이전트가 아이디어를 내고, 뜻이 맞는 동료 에이전트들과 회사에서 기금을 내놓아 장학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날 시상식에서 팔십 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다. 부동산 회사의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내년에는 백오십명, 후년에는 삼백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장학금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학업을 마치고 경제력이 생기면, 자신들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한 부동산 에이전트가 시작한 장학사업이 해를 거듭하면서 꿈나무에 주렁주렁 열매가 맺히고, 그 씨앗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아름다운 꿈나무 동산이 이루어져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 인심이 모질게 느껴질 때도 있다 . 하지만, 아름다운 꿈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이 따뜻한 사랑의 빛을 비추며 나눔의 동산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2004년 10월 미주중앙일보 "여자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