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뉴욕에 있는 친구로부터 아침마다 차가 와서 길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치워 간다는 얘기를 듣고 바싹 마른 낙엽위를 뒹구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리 많은 건 아니지만, 우리집 뒷 뜰에도 낙엽이 쌓여 있고, 탐스런 감이 주렁주렁 맺힌 나뭇가지는 지나는 새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지진때문에 크게 다치고, 또 수술을 여러 차례 받으면서도 밝게 자라준 딸아이를 생각해 본다. 4 년전 개인전을 앞두고 한창 바쁠 때에, 맹장이 터지고 장까지 꼬인 딸아이는30 여일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딸아이를 먼저 보낼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한동안 떨쳐지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듯이 지내온 지 벌써4 년이 되었다. 요즘도 딸아이의 몸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동부에 있는 대학들만 골라 입학원서를 보내고 있어서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철부지 아이같기만 한 녀석이 그 몸을 가지고 우리 곁을 떠나려고 하고 있다. 20 년전 나를 미국으로 떠나보내면서 느끼셨을 친정 엄마의 심정이 헤아려지는 것 같다.

딸아이를 치료해준 의사들을 떠올려 본다 . 마치 영화속의 장면처럼 열 분이 넘는 의사들이 어려운 고비마다 등장했다. 수술을 앞두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며 함께 안타까워해준 의사. 저녁 일곱시부터 다음 날 새벽 다섯시까지 매 시간 집에서 전화로 상태를 점검해준 고마운 의사. 수술후 4 년만에 우연히 마켓서 만났을 때, 이쁜 손녀라도 만난듯 반갑게 포옹을 해준 의사도 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참 겸손하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도우려는 훌륭한 분들인 것 같다.

20 년전의 미국은 내게는 오랜시간 비행기를 타고 건너 온 태평양과 같은 망망대해였다. 당시 내가 아는 사람은 남편 한 사람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를 아껴주고 끌어주는 스승도 만났고, 흉허물 없이 지내는 화가 친구들도 많아졌다. 먼 친척들과 왕래도 하게 되었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후배도 생겼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뇌리에서 사라졌다.

오래전 씨애틀에서 4 시간 정도 떨어진 솔닥이라는 곳을 여행하다 커다란 태극기가 새겨진 T 셔츠를 입은 늘씬한 미인을 만났다. 미군부대 기지촌에서 생활하다 성품좋은 부잣집 미군 병사와 결혼한 그녀는 수만 에이커의 산림을 소유한 큰 제재소의 사장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씨애틀에 있는 한국 마켓에 나들이를 다녀올 정도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그리워 백여 마일이나 떨어져 사는 충청도에서 온 시골 노인네들을 부모같이 모시고 산다고 하였다. 어쩌다 우리처럼 지나가는 한국인 여행객을 만나면 너무나 반갑고 좋아서 그 주위를 안내도 해주고 정성껏 음식도 대접한단다. 몸과 마음에 새겨졌던 깊은 상처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시원스러운 용모만큼이나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올해도 큰 탈 없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그 동안 있었던 기쁜 일들, 따뜻한 일들을 세어본다. 욕심을 내어 잡으려고 뛰어가면 멀어지고, 빈 마음으로 두손을 펴고 천천히 걸어가면 다가오는 크고 작은 행복함들을 뒤돌아 본다. 아쉬운 일도, 이루지 못한 일들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특별히 감사한다.

2004년 11월 미주중앙일보 "여자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