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이년 더 쓰세요'

요즘 전자제품 상점에는 대단한 유행이라도 만난 듯, 크고 작은HDTV 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선명한 화면과 날렵한 디자인에 쉽게 마음을 내주다가도 만만찮은 가격에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게 된다.

남편과 함께 큰 맘먹고 전자제품 상점을 몇 군데 둘러 보았지만, 플라스마, DLP, LCD 등 사용되는 기술에 따라 제품이 천차만별이고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하루가 멀다하고 떨어지는 가격을 고려하면 제품을 결정하기가 쉽지않았다. 고민 끝에, 타운의 전자제품 상점에서 세일즈 매니저로 일하는 D에게 전화로 자문을 구했다. D는 쓰고 있는 TV가 고장이 났느냐, TV를 바꾸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궁색한 내 답변을 들은 D는 ‘그냥 일, 이년 더 쓰세요’ 라며 그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일즈맨 답지않은 답변에 내 자신 다소 곤혹스러웠지만, 그의 정직함을 대하면서 한인 타운이 성숙해 가고 있음을 느끼는 듯 했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느 미술관 앞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평소보다 500 엔 정도 요금이 더 나왔다. 운전사에게 나는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는 화가로 벌써 여러 차례 같은 길을 오갔는데 오늘은 요금이 많이 더 나왔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운전사는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기가 지리를 잘 몰라 길을 돌아왔는 데, 차액을 환불해줘도 되냐고 물었다. 회사 직원은 흔쾌히 승락을 하였고, 운전사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차액을 돌려 주었다. 일본의 저력이 느껴졌다.

얼마 전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의 건강 보험이 바뀌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몇 달전에 예약한 우리 가족의 치과 검진이 있었는 데, 새 보험을 쓰기에는 며칠이 모자랐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치과 의사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려 했으나 공교롭게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 치과는 한 달에 한 번만 토요일에 환자를 보기 때문에 예정대로 가족 모두가 치과로 향했다.

벽에 걸려 있는 내 작품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았고, 직원들도 언제나처럼 친절했다. 이곳은 예약된 시간에 의사를 만나고, 예정된 시간에 정확하고 기분좋게 진료를 끝내는 치과로 유명하다. 진료후에 남편은 친구처럼 지내는 의사에게 보험 청구를 3, 4 일 늦추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의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 하면 안돼죠’ 라고 농담조로 답변했다. 남편은 순간 겸연쩍어 하면서 보험으로 처리하지 말아달라고 사과하고 화제를 돌렸다. 치과를 나서면서, 남편은 ‘저 친구한테 오늘 한 방 맞았네’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정직한 의사를 만나 기분이 좋은 듯, 표정은 유쾌해 보였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때로는 불편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짧지 않은 인생여정을 생각하면, 바르게 원칙대로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쉽고 마음 편하게 사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2005년 3월 미주중앙일보 "여자의 세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