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가를 따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턴가 “ 영양가” 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랜 동창을 만나도 학창시절에 나눴던 소중한 추억보다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신경이 쓰이고, 아이들의 친구가 집에 놀러와도 내 자식에게 보탬이 될만한 인물인가를 따져 본다. 학창시절, 또는 사회의 초년생 때에는 별 것도 아닌 것이 생겨도 나눠 먹으며 재미 있어 했는 데, 세월이 흐르고 서로의 위치가 확고해 지면서 순수했던 만남이 부자연스러워지는 일이 빈번해 진다.

4, 5 년 전에 어느 모임에서 타일랜드 태생의 화가를 만났는 데, 마침 사는 지역이 같아서 여러 해동안 잘 알고 지내고 있다. 그는 40 여년 전에 미국에 유학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영어 발음이 깨끗하지 않고 별로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다. 중키에 얼굴이 까맣고 시꺼먼 옷을 입고 다녀서 미국의 인디안으로 오인받을 때도 종종 있다.

아이도 없이 부부가 단촐하게 사는 집에는 늘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 . 타일랜드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숙식 제공은 물론이고 차를 몰고 다니며 미국 구경도 시켜준다. 결혼 하기전 모델을 했다는 부인은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치레를 해도 늘 웃는 낯이다.

지난 해에 이 타이 화가의 주선으로 미국 화가 몇사람과 함께 타일랜드에서 두 차례의 전시회를 하고 오면서 , 그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타일랜드 문화부의 후원으로 열린 전시회는 신문과 TV 의 조명을 많이 받았고, 리셉션은 영향력있는 있는 인사들로 성황을 이뤘다.

타일랜드에는 국민화가라는 제도가 있어서 매년 한 명의 화가가 선정된다는데 , 그는 57 세에 최연소로 국민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박사 학위가 세 개나 되는 교수님에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리는 유명인이지만 그는 누구에게나 진지하고 겸손하다. 타이 문화부의 주선으로 전국의 주요 문화재를 답사하는 여행을 함께 하면서 우리 일행은 그의 진솔한 삶에 고개 숙이게 되었다

지난 40 여년간, 타이랜드의 공주, 장관, 대학 총장 등 수 많은 사람들이 밸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묵었다. 가난한 화가도, 돈 없는 학생도 몇달씩 묵어 갔다. 우리가 흔히 애기하는 영양가 없는 사람들, 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타이랜드에서 여행을 하면서 만난 어느 화가는 자기 딸이 그 집에서 3 년을 살았는 데, 이제는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어느 신사는 30 여일 동안 자동차로 미대륙을 횡단 했는 데, 자기 생애 최고의 여행이었단다. 그렇다고 이 화가가 재력이 있거나 방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방이 되면 침대에서 자고 모자라면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잔단다.

20 여년전 가난한 미술교사로 그 집에 묵었던 어느 조각가가 지금은 라스베가스에 살면서, 그 곳을 방문하는 타이 사람들을 쉬어가게 하고 있다. 이따끔씩 전시장에서 마주치는 내게도, 베가스에 오면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당부를 한다. 아무 것도 해줄게 없는 나에게 다가오는 이국인의 따스한 마음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 지는 것 같다.

2005 년 10 월 미주중앙일보 "여자의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