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의 땅

80년대 초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우리 클럽에는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S대 영문과에 다니는 H가 있었다. 영어 실력은 물론 문학에도 이해가 깊었고, 대학 가요제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받을 만큼 노래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늘 깊은 주름이 있었다. 키가 유난히 작았기 때문이다. 1 미터 30 센티가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멋진 남자의 프로포즈는 커녕 과외선생 자리도 그녀에게는 들어오지 않았다. S대 영문과를 졸었하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번역일을 하면서 행상을 하는 어머니와 힘들게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 있을 때, 어느 중국식당의 주인 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키가 크고 눈코의 선이 뚜렷한 이 아가씨는 타고 난 미인이었다. 당시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는 데 이야기 끝에, 입시를 눈 앞에 두고 왜 식당일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기네 같은 화교를 뽑아주는 대학이 한국에는 없다는 한이 맺힌 답변을 하였다. 대학은 물론 화교를 채용하는 회사가 없는 데, 왜 힘들게 공부를 하냐는 것이었다. 읽찌감치 종업원으로 일이나 배워서 식당이라도 차리면, 더 이상 바랄수 없는 것이 자기들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스페니쉬 TV에는 난장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보통 연예인들과 어울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익살맞은 연기도 한다. 의상도 화려하고, 얼굴에 비지 땀이 그치질 않을 정도로 춤도 정열적이다. 하지만 이들 난장이 연예인들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없다. 웃고 박수치며 즐기는 방청객들의 얼굴에도 어색함이 없다. 키작은 가수의 열창에 흥이 오른 아가씨들이 무대에 뛰어 올라가 이들을 부둥켜 앉고 키스를 하는 장면도 낮설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성이 없는 한국 사람은 없다. 모두들 어느 왕이나 양반의 몇대손임을 집안의 자랑으로 여긴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극소수의 왕족이나 양반만이 성을 가졌고, 대다수 백성들은 성이 없었다. 재미있는 현상은 성이 없던 일반 백성들의 자손인 대다수의 한국인이 지금은 모두 성을 가지고 있고 족보를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서는. 휠췌어를 타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도 직장이 주어지고, 몇 사람 안되는 핸디캡 학생들을 위해 학교의 모든 시설을 바꾸기도 한다.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다는 나라를 이민자에게 개방하고, 수백만의 불법체류자들을 정기적으로 사면한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평등의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우리의 왜곡된 마음이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어 가길 기대해 본다.

2006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