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hard Richter의 40년 회고전을 다녀와서"

흔히 추상화와 사진은 극과 극으로 생각하는데, 현대 추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Gerhard Richter는 평생 동안 추상과 사진을 넘나드는 작업을 한 화가다. 마침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www.sfmoma.org)에서 그의 40 년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좋은 기회라 싶어 성탄절 연휴에 가족들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다.

1932년생인 Richter는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독일 패망 후에는 동독에서 미술 공부를 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직전에 서독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이번 회고전에는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62 년부터 2002 년까지 40년 동안의 작품 140 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관 4층 특별 기획실에 마련된 전시회는 대형 흑백 사진같은 인물화 20 여점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주로 연대순으로 작품은 배열되어 있었고, 간략하게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깨끗한 흑백 사진과 같은 작품들은 곧 촛점이 맞지 않는 사진과 같이 흐릿한 흑백 작품들로 이어졌다. 2차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고뇌가 많았던 작가답게 초기에는 소재도 군인, 비행기, 살해당한 시신, 창녀, 정치인 초상화 등 정치성, 사회성이 짙은 소품이 많았다. 고등학생인 우리 아이들은 사진 같은 작품과 재미있고 때로는 적나라한 소재에 흥미로와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작품도 대형화되고 소재도 자유로와지면서 (젊은 자기 부인을 그린 전신 채색 누드화는 아이들과 함께 보기는 다소 민망스러웠다.) 브러쉬의 터치도 점점 강렬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추상을 향한 기교도 다양하고 대범해져 갔다. Richter는 같은 소재의 작품을 자주 반복해서 그렸는데, 처음에는 사진과 같은 사실화를 그리고, 나중에는 사실을 부정하는 반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작품의 일부를 추상으로 처리하였다. 전시장 곳곳에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서, 추상을 이해하려는 방문객의 이해를 도왔다. 전시장마다 제작연도의 차이가 10 년 이내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작품을 보면서 제작연도를 알아 맞히는 게임(?)을 즐겼다.

80년대와 90년 중반까지의 전성기에 제작된 꼴라쥐를 이용한 대형 (320 cm x 400 cm) 추상화들은 그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모두가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며 마치 넋을 잃은 듯 발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관람자가 많았다. 3 시간 정도 걷고  피곤한 다리를 달래기 위해, 미술관 복도에 설치된 컴퓨터에 앉았다. 컴퓨터에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갖게 된 의문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작가가 왜 사진에 관심이 많았는지, 촛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같이 작품을 처리한 이유는 무엇인지, 작가는 어떻게 추상으로 접근했는지 등, 관람자들이 갖게 되는 의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들어 있었다. 작가의 작업 모습을 담은 비디오도 있었다. 사다리에 올라서서 빗자루보다도 큰 붓으로 대형 캔바스에 작업한 후, 다시 물감이 밴 4-5 m의 큰 나무 막대기로 캔바스를 한쪽 방향으로 흩을 때 나오는 꼴라쥐 효과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미술관을 나서기 전 구내 서점에 들렀는데, 이번 전시회를 위해 출간된 대형 화집과 자서전, 사상서, Postcard, 작가와의 인터뷰를 담은 비디오 등 참으로 많은 자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작은 미술관을 세울 정도의 비용이 들어 간 전시회라고 하는데, 작품과 전시, 준비 자료 등 모든 것이 훌륭했다.

10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화가도 미술 공부를 마치고 작품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변화하고 또 발전한다. 한 시대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화가의 작품 세계를 돌이켜 보는 회고전은 일반인에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며, 미술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2003 년 1월, 미주중앙일보 "예술을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