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이 엉망이라니"

억수같이 퍼붓는 비, 종일 드나드는 관람객들을 바라보는 나.

저 사람들은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텐데 어떻게 느끼고 읽고 가는걸까? 나는 전시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걸음 떨어져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어제 오늘 내일, 모두 내 마음 구석구석을 그린 것이다. 두 손바닥 위에 손금처럼 보이는 비밀을 그린 것도 있고, 생긴대로 잘 서 있는 나무, 찢긴 나무, 물 속에 거꾸로 쳐박힌 산, 사막 등 자연을 옮겨와서 터질 듯한 가슴을 누르고 변주시킨 작품들도 있다. 알아서 하루 종일 색깔이 변하는 하늘처럼 시간이 흐르는 대로 편안하게 그렸던 날도 있다.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며 그린 것들, 마음 비우는 연습을 하며 군더더기 없이 그린 그림도 많다. 하지만 어느 땐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을 그려서 더 많은 이야기를 숨은 그림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지난 8월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간 인사동의 상 겔러리에서 여덟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Opening reception에 꼬마 손님들은 오지 말라고 부탁했었지만 여섯 살짜리 조카가 왔었다. 그림 하나만 달라고 생떼를 부리더니, 집에 돌아가서는 "그림들이 모두 엉망이야", "숙모는 하얀 물감이 많나봐, 어떤 그림들은 흰 물감을 들이부었어"라고 말했단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내 마음을 도둑 맞은 것 같았다. 그랬지, 캔바스 앞에 서서 고요와 열정이라는 감정의 엇갈림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삭히면서 그려댔던가. 그런데 엉망이란다. 정말 어떤 관람객이 이렇게 딱 맞는 표현을 할 수 있으랴. 친구 화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 딸에게 말했더니, 그 딸은 "아빠 그림은 더 엉망진창이야" 라고 했단다. 우린 한참 웃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럴지도 모른다. 이렇게 엉킨 실을 풀어나가는 것이 나의 하루의 연속이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다.

예전에 비해 관람객들의 매너가 눈에 띄게 수준이 높아진 것을 느꼈다. 열심히 보는 뒷 모습.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하려고 하는 표정. "추상화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요?", "사진 찍어도 돼요", "저도 화가가 되고 싶은 데 몇 가지 물어봐도 돼요?", "설명 좀 부탁해도 돼요?", "다음 전시는 언제 하세요?", "다음 전시도 이 작품의 연속인가요?". 어떤 사람에겐 묻기도 전에 내가 물어보기도 하고 또 내가 답해주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인사동에서 보낸 비오는 날의 시간들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나는 만남의 전시였다. 20 여년 만에 만난 스승들, 친구들. 우루루 걷다가 비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는 왠일? 누군가의 목소리 "화가는 손만 안다치면 되요" 하면서 못본 척 앞서가는 매너좋은 신사는 누구인지. 돌아오는 날이 가까워지자 내 손과 마음은 나를 스튜디오 안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다음 번 전시엔 캔바스에 비가 많이 올 것 같다. 폭우 쏟아지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우산을 받고 전시장에 들어와야 될지도 모른다.

                2003 년 10월,  미주중앙일보  "예술을 따라서"